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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C030201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삼덕리 3구 상덕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보은

[굶어도 싸워야지]

최인환 할아버지는 삼덕리 3구 상덕마을 지금의 집에서 태어나 군대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 여지껏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올해 80세라는 할아버지는 다리가 조금 불편한 것 빼고는 아주 정정한 모습인데, 삼덕리에 사는 할아버지 친구들은 다 죽고 혼자 남아 있단다.

할아버지는 스무 살 때 칠성부대 7사단 8연대로 들어갔다. 그때는 이미 6·25전쟁이 난 후였으나 전선에 바로 투입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전투에 투입된 건 2차로 일어났던 1·4후퇴 뒤였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어. 그때는 내가 하사, 지금의 상병이지. 그때 정말 힘들었지. 굶었지. 굶어도 싸움을 해야지.”

1·4후퇴 이후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힘들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심하게 다쳐야만 돌아올 수 있었던 시대였다. 먹을 것도 많이 부족하고 전투도 치열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3년 만에 전쟁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군대 생활할 적에 한 번은 전방으로 전투를 갔었어. 전투 중 하루 저녁에 적이 나타났어. 100m 정도 가까워 총을 막 쏘고 난리도 아니었어. 전투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인데 군인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거야. 그때 11명이나 죽었어. 폭탄 터지고 지뢰 터지고, 총으로 맞고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면 조용히 하고 있으라고 윽박지르고 그랬어.”

할아버지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렇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는 정말이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한다. 당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 소대장의 명령으로 상대편 군인의 귀를 잘랐던 경험이었다. 그때는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귀를 자르라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키는 대로 했기에 죽지 않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며, 할아버지는 회한에 젖은 군대 이야기를 마쳤다.

[전쟁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딛고 일어선 삶]

최인환 할아버지는 19세 때, 조금년 할머니는 18세 때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이루었다. 결혼을 하고 1년 후쯤 애도 없는데 할아버지를 군대에 보내게 된 할머니에게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물어 봤다.

“결혼하고 1년 만에 갔지. 애도 없었지, 그땐. 망했지 뭐. 옛날에 어르신들 시집살이 심했잖어. 남편도 없고 서럽고, 윗방 찬대서 살았지 뭐. 마음고생 무지했어. 옛날에 내가 3년 동안 기도를 드렸어. 잘 근무하고 나오시라고 기도했었어. 근데 다쳐 가지고, 휴…….”

할아버지가 군대에 간 3년 동안 할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늘에 기도를 했다. 그리하여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할아버지는 군대에 간 지 3년째 되던 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다리에 부상을 당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멀쩡했던 사람이 목발을 짚고 오니까, 나 그런 거 처음 봤거든. 다리 치료 받으러 많이 다니셨어.”

그때는 죽는 사람도 많았을 때라서, 다친 할아버지를 보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뻤단다.

할아버지는 그때 이후 다친 다리 때문에 다리가 잘 구부러지지 않아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지게질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서 할머니가 옆에서 수발을 들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정성스런 간호 덕분에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살면 다 살아진다는 할아버지의 말 속에 지난날의 아픔은 어느새 잊히고 고통을 이겨 낸 아름다운 노년의 삶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정보제공]

  • •  최인환(남, 1931년생, 삼덕리 3구 상덕마을 주민)
  • •  조금년(여, 1932년생, 삼덕리 3구 상덕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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