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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B020103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시장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영숙

덕산읍 석장리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석장리에서 살고 있는 이정수 할아버지는 용몽리 농요로 2003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민요는 그의 삶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 시절 사진 찍기를 좋아하며 풍류를 즐겼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그는 소리로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생활 속에서 묻어 나오는 흥겨운 노랫가락이야말로 그를 즐겁게 살도록 해 주는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사진쟁이, 금니쟁이, 상쇠쟁이는 건달 중 건달]

이정수 할아버지는 1940년 석장리 35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다. 그의 조부가 논 일곱 마지기[약 4,628㎡]를 팔아서 아버지에게 사진기를 하나 장만해 준 뒤로, 아버지는 사진기를 가지고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이정수 할아버지의 기억에 아버지는 개인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집에서 현상도 했다. 그때는 물론 전기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시절이었으니, 조그마한 등잔불을 켜놓고 유리 원판을 써서 현상을 했다. 농사도 지으면서 사진도 찍으셨다는 것을 보면 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듯싶다. 그때는 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아버지는 농요를 전문적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동네 농악 책임자여서 가끔씩 사람들과 어울려서 부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단다.

옛날에는 사진쟁이, 금니쟁이, 상쇠쟁이는 아주 건달 중에도 건달로 여겼다. 사진쟁이, 금니쟁이, 상쇠쟁이가 떴다 하면 그 근방 여자들은 다 휘어잡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사진에 관심을 두는 걸 싫어했단다. “집안에 건달은 하나면 있으면 된다.”고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어쨌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정수 할아버지는 옥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왔다. 그 후 농사를 짓다가 20년 정도 소와 담배를 키웠다. 그 뒤 황소를 사서 5년간 키우다가 팔고 젖소 2마리를 사서 40마리까지 키워 냈다. 젖소 키우는 일을 15년 정도 했는데, 조금 살 만한가 싶더니 IMF를 맞았다. 사료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어쩔 수 없이 자식과도 같던 젖소들을 팔아넘겼다.

평생을 일만 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으려니 좀이 쑤시던 차에, 조평희 씨의 아버지 조용철 회장이, “야 이놈아 빨리 나와서 농악이나 쳐야지. 늙은이들 다 죽고 큰일 났다.”고 호통을 치며 이정수 할아버지를 집 밖으로 나오게 했다.

이정수 할아버지가 농요를 처음 접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언제 어디서든 들리는 농요를 바람 소리나 공기처럼 접하다가, 어느 정도 컸을 때는 어른들하고 같이 부르고 다녔다. 열여덟 살부터 농사를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동네 어른들과 품앗이를 다니면서 소리를 하고 자연스럽게 선소리, 뒷소리를 다 깨쳤던 것이다.

그때 농사와 지금 농사를 비교해 보면, 옛날 농사는 순전히 사람 손으로 할 수밖에 없으니 힘들기야 훨씬 힘들었지만, 노랫가락과 함께 하니 기계로 하는 지금보다는 더 재미있었다고 할아버지는 껄껄 웃는다.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노래]

옛날에는 논을 매고 풀을 뜯을 때 풍장을 치면 부잣집 같은 데서 저녁에 멍석을 깔고 수제비국이나 저녁을 해먹이며 막걸리를 내다놓고 먹고 놀게 해 주었다. 그때는 보리 근립이라 해서 농악을 치며 동네마다 다녔는데, 그러면 보리를 몇 가마씩이나 주는 부잣집도 있었다. 그것을 모아서 백중 때는 농악대회에 나가는 경비로도 쓰는 등 참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다.

당시에는 농사를 준비할 때, 음력 정월이면 사랑방에서 자기가 쓸 농기구들을 직접 만들었다. 소 연장이니 뭐니 쟁기 같은 곳에 쓰는 봇줄을 만들고 새끼 같은 것도 많이 꼬았다. 또한 마을마다 큰 사랑방이 있어서 밤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놀았다. 그때는 소리를 하면서 짚신이나 삼태기, 멍석까지 별걸 다 만들었다고 한다.

2월부터 3월까지는 농한기라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지게를 지고 가면서 여러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초평 아리랑」을 즐겨 부른 기억이 난단다. 「초평 아리랑」은 노래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 자유롭게 흥얼거리는 노래였다고.

[농요가 크게 탄력을 받게 된 계기]

이정수 할아버지는 쉰여섯 살부터 경로당에 나와서 농요도 부르고 농악도 했다. 1990년 1월 서영숙 교수와 CJB방송국에서 「무심천에서의 아침」이란 프로를 녹화하러 갔다가 당시 국악협회장으로 있던 이종달 씨를 만나게 되어서, 그 해 4월 2일 이종달 씨에게 경로당으로 농요를 들으러 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우연인지 운명인지 진천군수가 진천에서 충청북도 민속예술경연대회를 주최하는데, 정작 주최 측에서 출품할 작품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이종달 씨에게서 이정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진천군수는 노래를 듣자마자 용몽리 농요로 출품을 하라고 권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충청북도 무형문화재까지 되었으니, 참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것 투성이란 옛 말이 맞기는 맞나 보다.

[정보제공]

  • •  이정수(남, 1940년생, 덕산읍 석장리 주민,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28 읍 승격에 따른 행정지명 수정 덕산면 -> 덕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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