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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B010101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용몽리 용소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계영

덕산에서 맹동으로 뻗어 있는 국도 21호선을 따라가다 왼편 길로 접어들면 ‘용소마을’이라고 쓴 이정표가 나온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주)백산오피씨 공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산마루를 지나 내려가면 도로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덕산읍 용몽리 용소마을이 보인다. 마을은 작지만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을 구석까지 깔끔하게 포장된 길이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진천군에서 첫째였던 새마을 우수 마을]

용몽리 용소마을 경로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운동기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러닝머신에서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안마 침대에 누워 시원하게 몸을 풀고 있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그리고 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경로당 벽에 나란히 열 맞춰 걸려 있는 표창장들이었다. 표창장들을 보다 보면, ‘참 많은 일들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1974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한테 받은 상장이었다. 바로 용소마을 자랑거리 중의 자랑거리인 ‘우수 새마을 대통령상’이었다. 당시 부상으로 특별 지원금이라고 해서 거금 1백만 원도 함께 받았다고 한다. 일을 얼마나 잘했길래 그렇게 큰 상을 받았느냐고 할아버지들께 여쭸더니, 조성복 할아버지가 자세하게 일러 준다.

당시에는 뭐니 뭐니 해도 마을길이 좋아야 했단다. 그래서 마을길을 바르게 내려고 충청도지사가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여기에는 길이 좋아야 차가 다니고, 그러다 보면 사람도 물건도 쉽게 오고갈 수 있으니 당연히 마을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서부터 쭉 뻗은 길을 만들기 위해 변소도 없애고 울타리도 모두 걷어낸 다음 1반, 2반, 3반 사이로 길을 냈단다. 이때 말하는 변소는 예전에 밭에 거름으로 주려고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대소변이니 퇴비를 모아 놓은 자리를 말한다.

새마을운동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어쨌든 반듯반듯한 길들로 인해 마을의 외관 자체가 달라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뭐든 하면 된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대통령으로부터 상까지 받았으니,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고.

마을 사람들은 그때 부상으로 받은 상금으로 경로당 건너편에 있는 땅 1,120평[3,702.48㎡]을 마을 이름으로 샀다. 현재 하우스 몇 동이 자리하고 있는 그 땅은 마을농장이라고 하여 마을 재산이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소득으로 마을 공동으로 양돈 사업도 하고, 양송이 재배 농가를 육성하고 염소 농가도 육성했다고 한다.

[마을 연혁은 바로 이 두루마리에 다 있어]

마을의 역사에 대해 묻자 조성복 할아버지와 이병희 노인회장이 “우리 마을 연혁은 정말 잘 보관되어 있다.”고 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고는 두루마리 한 뭉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것이 우리 마을 역사고 전통입니다. 왜정 때부터 누가 지도자였는지, 마을 재산이 얼마인지 다 나와 있어요.”

이병희 노인회장이 한지로 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풀자 ‘마을 약력’이란 글자가 첫 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루마리에는 용몽리 용소마을의 지명 유래부터 시작해서, 1951년에는 무엇을 했고 누가 마을에 들어왔으며, 마을 지도자는 누군지 등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서울에서 마을 공동으로 상여를 구입했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두루마리에는 마을의 대소사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마을 책임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 분은 조권형 씨였다. 1955년의 마을 책임자는 조완영 씨였고, 1963년부터는 조성복 씨가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70년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용소마을은 새마을 시범마을로 뽑혀서 시멘트 300포를 지원받았다. 당시 마을 지도자는 신봉성 씨였는데, 그때 현재의 마을회관 터를 다졌다고 나와 있다. 또 그즈음 마을로 들어오는 큰길을 확장했다. 1989년에는 마을에 가로등을 가설한 데 이어 마을 도로를 포장했다. 2004년에는 경로당을 재건축했다.

두루마리에는 2009년 현재 이병헌 씨가 마을 이장을 맡고 있고, 조상희 씨가 새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까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연혁의 끝부분에는 용소마을 경로당이 우수 경로당으로 선정되어 운동기구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다면 두루마리에는 벌써 100여 년에 가까운 용소마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웬만한 애향심이 아니면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투박한 손으로 두루마리를 마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보면서, 용소마을 대소사를 기록하고 보존하여 마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자와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용몽리 용소마을에는 다른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규율이 하나 있다. 누구든 외지 사람이 용소마을에 둥지를 틀면 마을로 ‘입계’를 한다고 해서 ‘신입계’에 들게 하는 것이다. 신입계는 1961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 한 주민이 신입계에 들면서 쌀을 두 섬 한 말 아홉 되를 냈는데, 이것이 용소마을 첫 공동 자본이었다고 한다. 물론 꼭 쌀을 내야 하는 건 아니어서 막걸리나 사과 얼마씩을 내기도 한다.

처음에는 규율이 엄하게 적용되었다고 이병희 할아버지가 말해 주었다.

“부락 사람도 살림을 나잖아요? 어머니하고 살다가 살림을 나면,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그냥 있는데 아들이 절리 나가면 그 아들도 다시 들어야 됐어요. 그 전엔 부락 규율이 엄했죠. 부락 규율이 법이었습니다.”

15년 동안 마을 노인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이병희 할아버지는, 용소마을이 지금처럼 잘 살게 된 것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일이라면 모두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라고 자랑했다. 옆에 있던 조성복 할아버지 역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지 않았다면, 결코 대통령상과 같은 큰 상을 받을 수 없었을 거라고 거들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자신의 이익보다 마을을 위한 마음이 더 크고,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어 모든 일에 열심히 했기에 지금까지도 풍요롭게 마을이 운영되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용소마을이야말로 엄격한 규율 안에서도 보름달처럼 넉넉하고 따뜻한 정이 가득한 마을 같았다.

[정보제공]

  • •  조성복(남, 1931년생, 용몽리 용소마을 주민)
  • •  이병희(남, 1937년생, 용몽리 용소마을노인회장)
  • •  장기영(남, 1941년생, 용몽리 용소경로당 사무장)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21 읍 승격에 따른 행정지명 수정 덕산면 -> 덕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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