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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A030101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아

우리가 구산동마을의 역사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니는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추천해 준 사람이 임필수 할아버지였다. 임필수 할아버지의 전용 자가용은 커다란 푸른색 트럭인데, 언제나 트럭을 몰고 다니며 마을의 대소사와 집안일을 처리하느라 바쁘시다는 정보도 마을 사람들한테 얻어 들었다.

임필수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농다리전시관 건너편 중리마을로 찾아갔다.  중리마을회관을 왼편에 두고 30m쯤 걸어 올라가면 푸른 잔디가 소박하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임필수 할아버지 집을 만날 수 있다. 무성하게 자란 잔디로 꽉 채워져 있는 마당과, 주변에 나무와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집은 누가 봐도 정겨움과 소박함을 물씬 풍경 주는 한 폭의 풍경화였다. 할아버지 집 마당에 서면 중리마을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탁 트인 경치를 자랑하였다.

뒤꼍 마당에서 깨를 털고 있다가 나온 할아버지는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주었다. 1,100년을 이어온 상산임씨 세거지에서 임씨 성을 가지고 태어나 지금까지 구산동 토박이로 살아온 할아버지였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자연을 친구 삼았던 어린 시절]

구산동마을농다리를 지나 흘러가는 세금천, 마을의 화를 막아 주는 지밋산, 정월 대보름의 추억이 녹아 있는 망태산 등 물과 산이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임필수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이러한 자연을 벗 삼아 했던 놀이, 먹을거리 채집 등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임필수 할아버지 집 앞 마당에서 한눈에 보이는 이상테라는 곳이 예전에는 광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마을 어린이들이 모두 이상테에 모여 놀기도 하는 등 마을의 많은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특히 경주이씨 묘가 많았던 곳이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가장 인기 많은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농다리가 놓인 세금천이었단다. 임필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소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이상테 광장에서 놀던 모습과 농다리 근처에서 멱을 감던 모습을 떠올리며 생생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노는 건, 뭐 요기가 요가 이상테, 그전에는 한밭이 아니구 광장이 있었어, 그 경주이씨네 모이[묘]가 많았었어, 그라고 또 농다리에서 놀구. 농다리에서 목욕하구, 그저 애들하고 놀고. 거기서 뭐 또 그 넘어 저수지 있자너, 거가서 많이 놀고.”

또한 농다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위해 설치된 농다리 매점 왼편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동네 아이들의 가장 큰 놀이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흙과 나무로 뒤덮여 그 넓던 바위가 많이 모습을 감추고 있어 놀이터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 놀이는 별다를 것이 없고, 그저 커다란 바위를 함께 오르내리며 총싸움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임필수 할아버지와 임준호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마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자연과 친구 삼아 재미있게 지냈던 일을 회상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임씨 집안 독자 장가가던 날]

임필수 할아버지는 임씨 집안의 독자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늘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이런 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군 생활을 하며 살아오기까지 부모님이 노심초사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특히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구산동마을로 돌아와서 정신없이 치른 결혼식 이야기에 이르자,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가정을 지키느라 고생한 안식구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 열여섯 살에 그때는 뭐 선을 봤나, 맞선을 보지 않구. 중신애비가 있었거든. 중신애비가 소개해 줘서, 군대. 아니 의용군 가기 전에 장가들었지, 뭐. 그리구 떠 놓고서 군대 갔었지 뭐. 어머니 아버지 만나러 오구, 안식구가 고생 많았지.”

[조합장 시절, 88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다!]

임필수 할아버지 집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안방에 나란히 걸려 있는 할아버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일 것이다. 그런데 사진들의 내용이 워낙 다양해서 할아버지의 일생을 한눈에 가늠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진천군 문백면에서 조합장을 10년 동안이나 역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직무대리로 들어갔다가 당시 3년 임기 시절, 세 번의 투표에 당선되어 재임에 재임을 거쳐 10년 동안이나 조합장을 하게 되었다.

“거, 그때는 인저 대의원들이 있었어. 투표를 했었어. 투표. 그때 3년 말기인데, 근데 82년 2월, 82년 2월 2일날 직무대리로 내가 들어갔었거든. 그리구 그 해 7월달에 흑자를 내가 냈어. 돈을 많이 남겼다구. 거기 뭐 그때 판매 사업두 많구 딸기작목두 하구 그래서, 7월에 선거를 하게 됐었어. 그때 대의원들이 36명이 뽑는데 당선됐지 뭐. 3번 됐었어.”

조합장 시절의 사진들 중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며 찍은 사진도 있었다. 조합장 시절,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면 사업에서 흑자를 내는 등 문백면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도 인정받고 진천군의회 대의원 활동도 해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할아버지는,“그때는 대의원이 각 군에 하나씩 있었는데 내가 대의원을 해가지구 전두환이도 만나보고 또 선거위원장두 만나보고 여러 가지 했었어. 배운 것도 없는데…….”라고 하며 당시의 일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하였다.

방의 한쪽 벽면을 가지런히 차지하는 사진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성화 봉송을 했던 모습이었다.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여 온 나라가 축제로 들썩였을 때, 할아버지도 성화 봉송 주자로 한몫을 했던 것이다. “성황 봉송은 올림픽 할 때 내가 청주에서 받았어, 1호 주자였지. 문백학교까지 뛰었었어. 청주하고 진천하구 직경, 거기서 성화 봉송 받았지 뭐. 그때 88올림픽이니께 몇 년 됐나? 그 때 아마 마흔아홉 살에 조합장을 했으니까, 한 쉰 시절이여.”

불혹의 나이에도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자랑했던 뜀뛰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성화 봉송 주자로서 청주에서 오는 성화를 받아 문백초등학교까지 봉송했다고 한다. 문백면에서 100m 달리기는 늘 1등을 했다던 할아버지는, 끈기 있고 활동적인 모습 그대로 오늘도 구산동 토박이로 마을 대소사에 늘 함께 하며 구산동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정보제공]

  • •  임필수(남, 1932년생, 구곡리 구산동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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