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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A020403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설

[상산임씨 천년 세거지]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마을상산임씨의 천년 세거지로, 마을 주민 대부분이 신라 말의 인물인 임희를 시조로 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에 구곡리 구산동마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특정 성씨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주하여 세거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구산동마을 주민들도 천 년 세거지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여기가 임씨 천 년 세거지여. 천백 년이 넘었지, 어디도 이렇게 천 년이 넘도록 한 마을에 사는 건 없어. 우리는 여기서 천 년이 넘게 살았는걸.”

상산임씨의 집성촌답게 우리를 친손주처럼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아버지 대부분이 상산임씨였다. 또한 전설이나 열녀문, 부자 충신문의 인물도 상산임씨가 많았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임수전, 임현 부자]

중리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임수전, 임현 부자 충신문상산임씨임수전임현 두 부자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임수전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여섯 살 때 벌써 “인생천지간충효이자선(人生天地間忠孝二字先)”이라는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임수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과 의병을 모집하여 죽산과 봉성에서 일대 격전을 감행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군사와 무기가 부족하여 적의 칼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임현임수전의 아들로, 강홍립 장군의 휘하로 출전하였으나 만주의 부차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처럼 부자가 나라를 위해 순국하자 조정에서 1699년(숙종 25) 임수전을 형조참의에, 임현을 공조참의에 증직하고 다시 1721년에는 정문을 내렸다.

임수전, 임현 부자의 충신문은 정면 2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왼쪽 칸에 ‘부자충신문(夫子忠臣門)’이란 편액을 달았다. 정면에는 일각 대문을 세우고 주변은 돌과 회를 섞어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었으며, 정려문 오른쪽에는 사적비를 세웠다.

내부의 현판에는 왼쪽 칸에 “충신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충무위부사과임수전지려숭정구십사년신임십일월일명정(忠臣贈嘉善大父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副摠管行忠武衛副司果林秀筌之閭崇禎九十四年辛壬十一月日命旌)”, 오른쪽 칸에는 “충신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행어모장군훈련원주부임현지려숭정이백삼십삼년계축유월일가증정(忠臣贈嘉善大父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禦侮將軍訓練院主簿林賢之閭崇禎二百三十三年癸丑六月日加贈旌)”이라고 쓰여 있다.

정려문 왼쪽의 사적비는 1967년에 세운 것으로, 3단의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50㎝, 너비 55㎝, 두께 24㎝의 오석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었다. 비제는 ‘상산임공부자충신비(常山林公父子忠臣碑)’이며, 4면비로, 비문은 팔계(八溪) 변연인이 썼다.

[정보제공]

  • •  임준호(남, 1935년생, 구곡리 구산동마을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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