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790
한자 民俗
영어의미역 folklor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집필자 전재원

[정의]

충청북도 진천 지역 주민의 생활인 동시에 생활의 계속, 또는 반복에서 이룩되어 전승되는 민간 공동의 습속.

[개설]

민속(民俗)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마다 고유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활양식이나 풍습·미신·속담·민담·전설·신화 등을 포함한 구전문학, 그리고 음악·무용 등의 문화 양식을 한데 묶어 이르는 말이다. 사회 집단이 주변의 자연환경과 다른 사회집단, 더 나아가 집단이 속해 있는 국가 사이의 관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민속이란 인간이 자기가 속한 자연적 환경, 역사적 환경, 사회적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하기 위하여 지혜와 신앙으로 엮어낸 생활 풍속이라 할 수 있다.

[배경]

민속은 그 사회를 유지시켜 나아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으로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런 민속을 형성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이며, 그 지역의 풍토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즉 자연 환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천 지역의 민속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필요한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먼저 간략하게 기술해 보기로 한다.

1. 역사적 배경

진천군의 역사는 초평면 연담리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석기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문화를 누리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선사시대 유물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나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천의 지명으로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 기록되어 있다. 진천의 지명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진천은 금물노(今勿奴) 외에 만노(萬弩)·수지(首知)·신지(新知) 등의 지명이 사용된 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명이 개명되어 진주(鎭州)라 하여 지금 지명의 고형이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상산(常山)이라 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가 되면서 고려시대의 주(州) 중 작은 고을은 주(州)에서 점 셋을 뺀 천(川)으로 바뀌게 된다. 진천도 이러한 방법에 의해 진주(鎭州)에서 지금의 명칭인 진천(鎭川)이란 지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진천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에 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삼국시대에는 지역상 마한에 속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 먼저 속했으나 백제·신라 등에도 속했을 것이다. 진천은 삼국의 국경에 위치했기 때문에 어느 나라가 강성했느냐에 따라 지배를 받아 왔고 이에 따라 소속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이며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탄생지가 진천인 것으로 보아 지역상 가장 멀다고 하는 신라의 지배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2. 지리적 배경

진천군은 지리적으로 충청북도의 북부 지역으로 북쪽은 경기도 안성시, 서쪽은 충남 천안시, 남쪽으로는 청원군, 동쪽으로는 음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진천은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에 이속(移屬)되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이후 1914년 경기도의 일부와 음성군의 일부가 편입되었고, 1945년에는 청원군의 일부가 초평면에 편입되었다. 이는 경기도와 음성군, 청원군의 민속과 연계되는 지역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충청남도는 산맥에 의해 차단되어 큰 영향은 받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진천군은 1읍 6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읍은 진천읍이고, 6면은 광혜원면·이월면·덕산면·초평면·백곡면·문백면이다. 진천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광혜원면은 경기도 안성시와 진천읍, 음성군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이 있어 행정 구역상으로는 진천군이나 경기도 안성시, 그리고 음성군과 연계가 깊은 곳이다. 특히 중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음성인터체인지와 가깝기 때문에 교통상 음성군과 연계가 잘 되고 있다. 또한 교통의 요지가 되어 산업이 비교적 잘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진천군은 충청북도에서도 넓은 평야가 있으며, 일찍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백곡저수지초평저수지가 있었다. 그래서 농업이 주생산품이었을 시기에 충청북도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고 상대적으로 문화생활을 많이 누렸을 것으로 판단된다. 진천을 ‘생거진천’이라 일컫는 것은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천은 쌀의 생산이 많고, 쌀의 질이 좋기로 전국에서 이름난 곳이다. 특히 진천 쌀은 전국 으뜸농산물품평대회에서 일품 쌀로 인정받아 대통령상을 3회 수상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듯이 진천은 인심이 후하고, 논농사에 따른 민요도 풍부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진천군 백곡면은 저수지는 있으나 산이 많다. 그 결과 다른 면보다 산과 관련된 습속이 많으며, 민속 신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점이 나타난다. 또한 산이 많은 지역은 외부의 문화에 비교적 영향을 적게 받게 된다.반면 예술적인 생활을 즐길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료는 부족하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진천군은 넓은 들이 많고, 기후도 좋아 농업이 발달된 지역이다. 따라서 민속도 농업과 관련된 것이 많은 곳이다.

[특성]

지역에 따라 민속의 특징을 고찰하려면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각 지역의 군지(郡誌)에 기술되어 있는 민속을 진천군의 자료와 비교해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점 몇 가지만 알아보기로 한다.

1. 음식

음식에 있어서는 혼인 또는 근친을 갈 때 쌀농사가 많기 때문에 엿을 만들고, 또 용 모양의 용떡을 만드는 것이 진천 지역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민간신앙·민간요법

민간신앙이나 민간요법은 다른 지역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인다고는 할 수 없다. 무속신앙도 충청북도 지역의 특징인 앉은 굿 또는 독경이 중심이나 지금은 서사무가를 앉아서 부르고 있다. 시대에 따라 무속이 바뀐 현상이 아닐까 한다. 전통적 민간신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터주·성주·제석·칠성·조왕·삼신할머니·신주·용왕·업 등을 섬김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중에서 터주와 칠성의 경우 일부 농촌에서는 종신(宗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곳이 있기도 하다.

마을신앙 또한 여느 지역의 일반적인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제일(祭日)이 음력 정월 초에 집중되어 있고, 당집 제당과 자연 제당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제물에서는 통돼지를 올리는 경우가 많고, 마짐시루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금줄을 두르면 외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마을에 들어온 사람도 제사를 마쳐야 나갈 수 있다는 관념도 매우 널리 퍼져 있다.

3. 평생 의례

평생 의례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활하다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의식을 말한다. 즉,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를 말하는데, 조선시대부터 숭상된 유교(儒敎)의 바탕 위에서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번잡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았다.

1973년 5월부터 「가정의례준칙」과 「가정의례법」이 공포·시행되어 진천 지역의 평생 의례는 많이 간략화되어 관례는 사라지고 혼례와 상례는 예식장 같은 특정 공간에서 치뤄지고 있다. 제례의 경우에도 새로운 종교의 유입과 관련하여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4. 민속놀이

민속놀이에 있어서는 놀이 방법이나 시기가 다른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경기도 남부 지방인 용인시, 안성시와 충청북도의 음성군에 있는 거북놀이가 추석에 많이 행해졌다. 단지 진천군 이월면에는 단편적으로 약간 기억하고 있는 소 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행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5. 설화

설화는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와 관련된 것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특히 진천 지역은 통칭 ‘생거진천’ 이라고 불리우는데 이것은 진천의 자연 환경적 요인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생거진천’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1) 첫째 이야기: 옛날에 진천과 용인에 추천석이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살고 있었다. 진천의 추천석은 양순하고 농사만 짓고 사는 사람이었던 반면에 용인의 추천석은 부자로 살면서 심술이 많아 동네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염라대왕이 용인의 추천석을 괘씸하게 여겨 사자(使者)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으나 사자가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 갔다. 이에 다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인지라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들이고 그 시체에 진천 추천석의 영혼을 넣어 환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다시 환생하여 용인에서 살았다고 한다.

2) 둘째 이야기: 옛날에 한 여자가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고 단란히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진천으로 개가하여 아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용인 아들이 성장하여 진천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진천의 아들이 극구 반대하여 결국 관가에 소장(訴狀)을 내었다. 관가에서 판결하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모시고 제사도 모시도록 하라”고 하여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용인으로 간다는 전설이다. 위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없는 전설일 뿐이다.

3) 셋째 이야기: 진천 지방은 옛날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성하고, 한해(旱害)와 수해(水害)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롭고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살만한 곳이기에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하였고, 용인은 산세가 순후(順厚)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소가 많기에 사거용인(死去龍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6. 민요

진천 지방 민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논농사 위주의 농업을 주로 해온 탓으로 논농사요, 이를테면 「모찌기 노래」, 「모심기 노래」, 「논 매기 노래」 등이 많고 동시에 시집살이의 설움과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노래가 많이 전해 온다. 대부분의 농요는 그 가락이 경쾌하고 흥겨운데 비해 진천 지방의 민요는 가락이 매우 구성지고 애조를 띄고 있어 향유층(享有層)의 한과 설움이 진하게 나타나 있다.

진천 지방에서 전해오는 민요 중 덕산면을 중심으로 한 「진천 용몽리 농요」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몽촌마을에 전승되는 ‘두레굿’의 농사 소리로 1999년 충청북도 민속예술경연대회 대상, 2000년 전국민속경연대회 문화관광부장관상, 2001년 박팔계 선생 50주기 추모 충청북도 민요경창대회 최우수상 수상 등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기능 보유자들의 자질이 매우 높아 충청북도를 대표하는 농요로 인정받았다. 2003년 3월 14일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향토 문화 계승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진천 용몽리 농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천 용몽리 농요」는 「중원 마수리 농요」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타 지역의 농요와는 달리 수확 시기에 행해지던 수확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원나라 세조 홀필렬이 진천에 사는 오씨를 황후로 맞으면서 말 4필씩 9조로 행차를 하고 아홉 가지 예를 갖췄다는 데서 이름을 따 「구마리 장터 농요」로도 불린다.

「진천 용몽리 농요」진천군 덕산면 일대인 대월들, 몰골돌, 옥골돌에서 농사를 하면서 전래되어 온 농요로서,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산수리 일대에서 행해져 오던 것이 현재는 용몽리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선소리꾼 3인과 뒷소리꾼 70여 명이 농요를 연행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충청북도 지역의 특징을 양호하게 전승·보존하고 있다. 중원 마수리 지역의 농요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표현 기법상 상이한 점이 있다. 음정 체계는 일반적으로 충청북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진천 용몽리 농요」는 논농사의 과정에 따라 동작이 적합하게 짜져 있으며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논뜯는 소리」 등을 거쳐 「풍장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모찌는 소리」는 농요의 첫 단계로 “뭉치세 뭉치세 이 모판으로 뭉치세”라는 후렴구를 부른다. 「모찌는 소리」는 모내기의 첫 단계로 노동력의 절반이 소용될 정도로 힘든 일이다. 지치고 힘든 농부들의 사기를 불러일으키는 후렴구가 특징이다.

모찌는 단계가 끝나면 「모심는 소리」로 이어진다. 논을 써래질 한 후 모내기가 시작되는데, 모진 애비[모첨을 지게에 실어 나르는 사람]는 모첨[모춤의 사투리: 서너 움큼씩 되게 묶은 볏모나 모종의 단]을 운반해 주고 양끝의 줄잡이가 작업의 균형을 잡아주며 「모심는 소리」가 이어진다. “야기도 허하나 저허 저기도 또 하나”라는 후렴구로 모내기가 여기저기서 이루어진다.

모가 자라면 「논매는 소리」가 이어진다. “어하 호호 에하 호호오”라는 후렴구를 통해 자라는 모를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모심은 논에 모 뿌리가 활착하면 논뜯기 작업이 시작되며 「논뜯는 소리」가 이어진다. “올 노을 노을 상서되야”가 후렴구로 사용된다. 논뜯기 작업이 끝나면 이어지는 「풍장 소리」는 진천 아리랑을 부르며 흥겨운 시간을 갖는다. 「풍장 소리」는 일꾼들이 모이면서 시작하고 돌아가는 길에 「방골 큰애기 이야기」와 관련된 후렴구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를 부른다. 「풍장 소리」는 피로를 푸는 단계로 북이 장단을 주도한다.

「진천 용몽리 농요」의 가창 방법은 선소리꾼 3명이 각 단계마다 돌아가며 하기도 하는데, 한 사람이 메기면 전체가 후렴구를 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가락은 금강 유역의 한 줄기인 미호천 유역의 음성과 청주, 특히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는 미호천 유역 들노래의 특성을 잘 갖추고 있다. 사설은 주로 은근하게 이어져 일의 과정과 동작이 적합하게 짜져 있어 농사일에 지친 농부들의 피로를 잊게 하고 흥을 돋운다.

「진천 용몽리 농요」는 타 지역의 농요와는 달리 수확 시기에 행해지던 마당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낫의 사용과 관련하여 작업 진행이 더디어져 수확놀이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농요의 구성이 양호하고 선소리꾼들의 전승 실태가 우수하다. 「중원 마수리 농요」와 큰 차이점은 발견할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농요의 원형을 갖추고 있으며,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고 있는 농요이다.

[의의와 평가]

민속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진솔한 삶의 자취가 뿌리 내린 문화로 고유하게 전해 내려오는 생활양식이나 풍습·문화 양식 등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민속은 시대 변화에 따라 생성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며, 또한 잊어져 가는 등 계속 변화한다.

민속이 우리들의 삶의 자취이며 정신문화의 뿌리라면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하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만 년을 이어져 내려온 우리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현지 조사를 통해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정리하고 전승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삶을 살아갈 지혜를 얻고, 앞으로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는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좋은 자료가 진천군 차원에서 집대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발간 보급한 지역 문화에 대한 도서와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부족한 부분은 채울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범 군민적인 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진천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한 자리에 정리 보관하여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사업이라 할 수 있다.

각 가정이나 부락에서는 현재 보관 중인 자료들을 낱낱이 공개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하며, 학계나 교육계에서는 자료 발굴 및 비교 분석 연구에 노력해야 할 것이고, 지자체에서도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에 군사적 접적 지역의 특성을 가진 진천 지방은 역사적·지리적·민속학적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