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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702
이칭/별칭 농다리,수월교,지네다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32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영범

[개설]

다리는 언제 어디서 기원하였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만큼 다리는 인간의 삶에서 매우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이고 진보된 기술로 짜임새 있게 다리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삼국시대이다. 이전의 다리는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불편함을 덜기 위해 통나무를 걸치거나 주변의 돌을 띄엄띄엄 놓아 빠지지 않고 다닐 수 있게 한 정도였다.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농교]

진천 농다리[鎭川籠橋]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洗錦川)에 놓인 아름다운 돌다리로, 1976년 12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원래는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의 교각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양쪽으로 2칸씩 줄어 24칸만 남았다. 교각 위에 길이 170㎝, 내외 너비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한 개나 길이 130㎝, 너비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두 개를 나란히 얹었고, 교각과 상판은 사력암질의 붉은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렸다.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하상이 높아졌다.

진천 농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 방법에 있다.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석회 따위로 속을 채우지 않고 돌만으로 쌓았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임을 알 수 있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았음에도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축조 기술은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이처럼 농교는 내를 건너다니는 교량의 의미뿐만 아니라 옛 조상들의 멋과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농교 아래를 흐르는 세금천 물줄기는 초평면을 지나 오창면으로 이어지고, 농교를 건너 산길을 넘으면 초평저수지로 이어지는데,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초평저수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농교의 어원]

농교는 얼기설기 얽었다 하여 농다리, 장마 때는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간다 하여 수월교(水越橋),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지네가 물을 건너가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지네다리라고도 한다. 특히 겨울 저녁노을이 질 때 다리에 눈이 쌓인 설경은 ‘농암모설(籠岩暮雪)’이라 하여 진천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상산팔경 가운데 6경으로 꼽는다.

이와 달리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농다리의 ‘농(籠)’은 농다리를 비롯하여 농독·농돌·농바우·농여 등에서 보듯 지명에 적극적으로 쓰이는 선행 요소로, 농 궤짝을 쌓아 올리거나 농짝처럼 포개져 있는 듯한 형상의 지물(地物)을 표현할 때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농다리는 ‘농 궤짝을 쌓아 올리듯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다리’로 풀이할 수 있다. 실제 농다리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교각을 축대 쌓듯이 차곡차곡 쌓아 올렸고, 농교(籠橋)라는 한자 이름에도 대응된다.

[문헌에 나타난 농교의 면모]

1932년 이해용이 펴낸 향토지인『상산지(常山誌)』농교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농교는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세금천과 가리천(加里川)이 합류하는 굴치산(屈峙山) 앞에 있는 다리이다.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인 고려 초에 굴치의 임씨 선조가 전하여 임장군(林將軍)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창설하였는데, 붉은 돌로써 음양을 배합하여 건축을 하여 위로는 28수에 응하여 28칸으로 지었다. 수문은 매 칸마다 각각 돌 하나씩을 걸쳐서 하나의 활이 뻗쳐 있는 것 같았다. 그 구조가 자못 허술해서 장마 물이 넘칠 때면 다리 위로 흘러 거의 몇 길에 이르렀고, 노한 파도와 놀란 물결이 그 사이에서 소리를 내었다. 일찍이 하나의 돌도 달아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4칸이 매몰되어 현재는 24여 칸이 있다. 그 설치한 것을 돌아본즉, 흩어져 있는 돌이 포개어 쌓인 것에 불과한데도 험한 여울에 가로질러 있으면서 능히 천년의 오랜 시간을 지탱하였으니, 세상에서 신기하다고 일컫는 것이 당연하다[籠橋在郡南一里洗錦川加里川合流之屈峙前橋也距今九百餘年前卽麗朝初葉時代屈峙林氏先祖傳稱林將軍者創設而以紫石配陰陽而建築上應二十八宿爲二十八間水門每間各架一石延 一弓許其構造頗虛疎盛 漲溢時橋上之流幾至數丈怒濤驚浪春撞其間曾無一石移轉然歲月旣久四間埋沒現餘二十四間顧其架設則不過亂石之疊積而橫在險灘能支千年之久世稱神異宜矣].”

여기서 임 장군은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운 임희(林曦) 장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 말기의 실력자였던 임연(林衍) 장군이 만들었다는 전설도 전해 오고 있어 이 일대 호족 세력이었던 임씨 일족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1910~1937년까지 인문지리 현황을 담은 국내 최대의 지리서인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하나의 곧 다리가 구산의 동쪽을 누르니 호랑이가 버티고 용이 서린 것 같도다. 이미 천년을 지나 떨친 명성은 스물여덟 칸에 이어진 조화를 통달하였는데, 흐르는 물결이 긴 만큼 영웅의 한을 머금었으니, 다니는 길마다 장사들의 공을 탄식하여도 장군의 한을 달래려 하나 조문할 곳이 없으니, 석양에 곱게 물든 하늘과 강물만 막막하구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농교에 서린 천년의 숨결]

고려 고종 때 일이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아침, 임연 장군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다가 세금천 건너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여보시오,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일로 내를 건너려 하는 게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입니다.”

여인의 지극한 효성을 딱하게 여긴 임 장군은 잠깐 기다리라 하고 즉시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하루아침에 농다리를 놓아서 부인이 발을 적시지 않고 내를 건너도록 하였다. 그러나 돌을 실어 나른 용마는 너무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때 용마의 고삐가 끊어져 떨어진 돌을 그대로 두었는데, 이것이 용바위[쌍바위]라고 전해 온다.

진천 농다리 앞에 있는 농다리전시관에는 농교에 얽힌 몇 개의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 하나는 임연 오누이 힘내기 설화[동국대학교 학술조사팀 현지 연구 중에서]이다.

옛날 굴티 임씨네 집안에는 아들딸 남매가 있었는데 둘 다 훌륭한 장사라서 서로 죽고 사는 내기를 하였다. 아들 임 장군은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목매기송아지를 끌고 서울로 갔다가 오기로 하고, 딸은 농다리를 놓기로 하였다.

아들은 목매기송아지를 끌고 서울로 가고, 딸은 치마로 돌을 날라 다리를 놓기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가만히 보니 아들은 올 기미가 없는데 딸이 놓는 다리는 마무리가 다 되어 가는지라,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묘책을 내어 딸에게는 뜨거운 팥죽을 해다 주며 일을 늦추게 하여 결국 아들이 먼저 돌아와 내기에 이겼다.

딸이 화가 나 치마에 있던 돌을 내리쳤는데 아직까지도 그 돌이 그대로 박혀 있다고 한다. 약속대로 딸은 죽음을 맞았고, 딸이 놓지 못한 나머지 한 칸은 다른 사람들이 놓았다고 전해진다. 역사적으로 여자 장사가 놓은 다리는 그대로 있는데, 일반 사람이 놓은 다리는 장마가 지면 떠내려간다고 한다. 농다리 건너 살고개에는 장사 발자국과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오누이 힘내기 설화는 진천 농다리에만 관련된 설화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오누이 힘내기 설화를 진천 농다리에 적용시킨 경우라는 생각이 든다. 위 내용을 토대로 약간의 변형을 거친 여러 형태의 오누이 힘내기 설화가 전해 오기 때문이다.

그 밖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6·25전쟁이 일어난 해에 농다리 근처의 동네 사람들은 듣지 못했으나 인근의 초평면덕산면 지역 주민들은 큰 능구렁이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가 농다리의 울음소리라고 한다.[제보자 임상직, 2003년 당시 80세]

또 예부터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나라에 큰 재앙이 일어나고, 훌륭한 인물이 죽거나 기상이변이 일어난다고 전해진다. 한 예로 농다리는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등을 예고했다고 한다.[제보자 안상춘, 2003년 당시 93세]

[농교를 건너 세계로]

진천 농다리는 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흐르는 냇물은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천년 전 효성 지극한 여인이 흘린 눈물이 우리의 대지를 촉촉이 적셔 주고 있는지 모른다.

진천군에서는 몇 해 전부터 농다리 주변 명소화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해마다 농다리축제를 열고 있다. 2005년에는 농다리유래비를 세웠고, 2007년에는 농다리 전시관을 세워 농교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농교를 보고자 찾아오고 있으며, 머지않아 세계에서도 농교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하여 진천으로 모여들 것이다.

이처럼 농교는 오래된 돌다리라는 존재 의미를 넘어서 세계를 진천으로 진천을 세계로 이어 주고,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이어 주는 이 시대의 상징으로 살아 숨 쉴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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