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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97
한자 金德崇
이칭/별칭 자수(字修),모암(慕庵)
분야 종교/유교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자|문신
출신지 황해도 개성시
성별
생년 1373년연표보기
몰년 1448년연표보기
본관 강릉(江陵)
대표관직 한산군수

[정의]

충청북도 진천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효자.

[가계]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자수(字修), 호는 모암(慕庵). 아버지는 김천익(金天益)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활동사항]

김덕숭(金德崇)[1373~1448]은 지금의 황해도 개성[옛 송도]에서 태어났다. 고려가 망하자 송도판윤으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지금의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추자(楸子)마을에 정착하였다. 1393년(태조 2)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출사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귀향하여 부모 봉양에 전력을 다했다. 1426년(세종 8) 한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팔십 노부모를 모시기 위해 석 달 만에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부모 봉양에만 힘썼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당(堂)에 나가 산신께 기도를 올리니 꿩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미나리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 살펴보니 김이 서려 있는데도 싱싱한 미나리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어 따다가 드시게 했다. 또한 잉어를 구하기 위해 지금의 백곡저수지 아래 여계곡(女溪谷)으로 가서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여러 날 기도를 한 끝에 앉은 자리가 녹아 생긴 구멍에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 나왔다. 한 마리는 놓아 주고, 한 마리는 집으로 가져와 끓여 드렸더니 어머니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김덕숭이 62세 되던 해 어머니가 84세로 세상을 뜨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애통해하면서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또한 집과 묘막을 오가면서 아버지를 봉양하며 삼년상을 치렀다. 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슬퍼하며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또 장모를 집에 맞아다가 어머니처럼 모셨다.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1444년 3월 초정(椒井)에 거둥하셨을 때 김덕숭의 효행을 듣고 술과 고기를 직접 하사하였으며, 충청감사로 하여금 술과 고기·쌀 열 가마를 특사하게 하였다. 이에 즉시 아버지와 왕을 배알하고 사은숙배하니 의복 한 벌씩을 또 하사하였다.

이해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합장하고 시묘를 하였다. 시묘를 하면서 잘 때도 요와 이불을 깔거나 덮지 않으며 밥을 먹지 않고 죽으로만 끼니를 연명하여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주위에서 이를 말리자 “아비를 땅속에 묻어 놓고 집으로 돌아와 차마 먹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내가 이미 양친을 잃고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 억지로 세상에 살아서 다시 누구를 위하겠는가. 비록 뫼 옆에서 죽더라도 한이 없다”며 새벽부터 밤중까지 시묘를 하였다. 1448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와 신도비가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5번지에 있다 평산리에서 진천읍으로 넘어가는 도로변 왼쪽 산자락 끝에 신도비가 있고, 뒷산 중턱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어제시(御製詩) 3수를 내려 정각을 건립하게 하였으며,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효행을 기록하게 하였다. 1631년(인조 11) 이월면 사곡리에 효행을 기리기 위해 목조 기와 맞배지붕으로 사방 한 칸의 진천 김덕숭 효자각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문신 신잡(申磼)김덕숭을 추모하여 백원서원(白源書院)을 세워 제향하는 한편, 백곡저수지 근처 절벽 위에 백원정(白源亭)도 지었다고 한다. 현재 백원정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703-1번지에 있는데, 김덕숭의 21세손인 김동휘(金東輝)가 여계소(女溪沼) 동쪽 절벽 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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