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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91
한자 趙感
영어음역 Jo Gam
이칭/별칭 백파(栢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성별
생년 1604년연표보기
몰년 1689년연표보기
본관 평양(平壤)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평양(平壤). 호는 백파(栢坡). 대제학 조정수(趙廷壽)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충청절도사를 지낸 조맹손(趙孟孫)이다.

[활동사항]

조감(趙感)[1604~1689]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19세 때 광해군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유배 보냈다가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난정(亂政)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진천의 만노산성(萬弩山城)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유창국(柳昌國)과 함께 인근 7읍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피난민을 정비한 뒤 돌을 날라다 성을 수축하고 나무를 베어 성책을 꾸며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또한 활과 화살을 만들고 장정들을 요충지에 배치하여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부녀자들까지 전비를 갖추게 하였다.

마침내 적이 공격해 오자 깃발을 높이 들고 북을 치며 독전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게 하였다. 이어 유창국은 전군에 이르기를 “적은 내일 또 올 것이니,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하여 전비를 가다듬고 뒤이을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다시 공격해 오자 하루 종일 성 위에 올라가 전투를 독전하였다. 이에 적은 또다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가면서 7읍의 주민 수천 명이 그들의 지휘에 힘입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만노산성의 승전에 뒤이어 조감은 300명의 정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이르렀으나,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루 종일 통곡하다가 되돌아왔다. 한편 조감만노산성에서 피난하던 와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죽만 먹으면서 시묘를 한 효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1689년(숙종 15)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851년(철종 2) 진천군 백곡면 가죽리(佳竹里)죽계사(竹溪祠)에 제향되었는데, 죽계사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터만 남아 있다. 1949년 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진천 길상사(吉祥祠)에 배향되었다가, 1961년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만뢰사(萬賴祠)를 새로 지어 이향(移享)하여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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