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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75
한자 全燁
영어음역 Jeon Yeop
이칭/별칭 쌍암(雙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효자
출신지 충청북도 옥천군
성별
생년 1505년연표보기
본관 옥천(沃川)
대표관직 현감

[정의]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쌍암(雙岩). 아버지는 상주목사를 지낸 전팽령(全彭齡)이다.

[활동사항]

전엽(全燁)[1505~?]은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60세 가까운 늙은 몸으로 3년간 시묘하면서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시묘하는 도중에 산소 부근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고, 하얀색 제비가 날아와 집을 짓는 등의 이적(異蹟)이 있었다고 한다. 계모상을 당해서도 마찬가지로 시묘를 하였다. 효행으로 정려되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기록이 『명종실록(明宗實錄)』에 전하는데,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옥천(沃川)에 거주하는 생원(生員) 전엽(全燁)은 ‘천성이 순근(純謹)하여 사람을 성심으로 대접하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비인 목사(牧使) 전팽령이 치사(致仕)한 뒤로 빈궁하여 끼니도 자주 어려워지자, 전엽이 힘을 다해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적극 마련하였고 그 음식이 남으면 반드시 아비가 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주고자 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자식이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을 이르는 말]하여 슬하를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서 모시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다. 기유년(己酉年)에 아비의 명령을 어기기 어려워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으나, 관직을 얻는 것에 급급하지 아니하여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았으니 이는 혼정신성을 빠뜨릴까 염려해서인 탓이다. 평소 오가는 빈객이 아비를 방문하면 몸소 반찬을 마련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였고, 병을 간호할 적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옷에는 띠를 풀지 않았다.

대고(大故)를 당하여서는 치상(治喪)의 절차를 일체 『가례(家禮)』를 따랐고, 복(服)을 마친 뒤에도 출고반면(出告反面)[나갈 때는 부모님께 반드시 출처를 알리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뵈어 안전함을 알려 드린다는 뜻으로, 밖에 나갔다 오거나 들어올 때 부모님께 반드시 알려야 함을 이르는 말로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의 준말]을 언제나 평소와 같이 하였다. 계모를 섬기는 데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고 족친 중에 빈궁하여 오갈 데 없는 이를 가엾게 여기어 구제해 주곤 하였다.

5촌질 되는 사람의 부처(夫妻)를 10년 가까이 데리고 있었는가 하면 논밭까지 넉넉히 주어 생계를 개척하게 하였고, 또 조카 두 사람이 몹시 빈궁하자 논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였으므로 향당(鄕黨)이 그 효우(孝友)를 일컫고 여리(閭里)가 그 행의에 탄복하였다. 이에 문려(門閭)에 정표를 하고 벼슬로 포상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과 『상산지(常山誌)』, 『진천군지』 등에도 기록되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556년(명종 21)에 효행으로 정려되고, 벼슬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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