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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443
한자 校成里寺址
이칭/별칭 교성리사지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산 10-8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박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절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고려시대
지정면적 약 2,644㎡
소재지 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산 10-8 지도보기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변천]

교성리 절터에 관한 문헌 기록이나 명문 기와 등은 발견되지 않으나, 진천 교성리 연화대좌의 양식으로 보건대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된다. 또한 소재지의 명칭이 탑골이고, 거대한 불상의 석조대좌가 전하여 오래된 절터였으리라 짐작된다. 남산의 북록에 위치한 지형으로 보아 북향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얼마 전까지 독립지사 이상설(李相卨)[1870~1917]의 위패를 봉안한 숭렬사가 있었다.

[위치]

교성리 절터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행저골마을 남동쪽의 속칭 탑골이라 불리는 남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교성리 절터의 면적은 약 2,644㎡이다. 일제강점기에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약간의 기와편이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진천 교성리 연화대좌는 일제강점기 조사 자료에 연좌라는 명칭으로 처음 소개되었으며, 『문화유적총람』에 지대석은 자연석이며 하대석과 중석은 8각으로 되었고 상대석은 반구형인데 연꽃무늬가 조각되었다고 나와 있다. 연화좌의 높이는 약 1.4m, 상부의 직경이 1.9m이며,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진천 교성리 연화대좌는 규모로 보아 다른 곳에서 이전해 온 것으로는 볼 수 없어 본래부터 교성리 절터에 있었을 듯하며, 형태로 보아 불상의 대석으로 생각된다. 앙련이 장식된 상단석은 화려한 문양을 갖추었으나, 하대석과 중대석은 상대석에 비하여 규모도 매우 작고 조각이 없어 불균형을 이루고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각 부의 실측치는 전체 높이가 약 134㎝이고, 하대석의 높이가 14㎝, 하대석 각 면의 너비가 61㎝이며, 중대석의 높이가 38㎝, 중대석 각 면의 너비가 49㎝이다. 상대석의 높이는 79㎝, 상대석의 지름은 204㎝이고, 연판의 길이는 22㎝, 연판의 너비는 30㎝이며, 보상화의 길이는 50㎝, 보상화 너비는 75㎝이다. 이외에 절터 주변에서 연화문 수막새와 당초문 암막새가 출토된 바 있으며, 현재는 고려시대의 평와편이 소량 발견된다.

[현황]

숭렬사가 옮겨간 교성리 절터남산골 체력단련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진천 교성리 연화대좌는 근래에 진천향토민속자료전시관 마당으로 옮겨졌다.

[의의와 평가]

교성리 절터는 충청북도 진천군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규모가 크면서도 장식이 화려한 진천 교성리 연화대좌가 전하는 점 등으로 보아 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진천을 대표하던 사찰이 있던 곳이라 짐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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