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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강화학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40
한자 鎭川江華學派
영어의미역 Ganghwa school in Jincheon are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전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파(學派)

[정의]

조선 후기 및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활동한 유교 학파의 하나.

[개설]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정제두(鄭齊斗) 이후 가학(家學)으로 양명학을 전수해간 일련의 관료 유학자들이며 하곡학파(霞谷學派)라고도 한다. ‘강화학(江華學)’이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 양명학의 정립자인 하곡(霞谷) 정제두가 강화에서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했던 것에 착안하여, 후대의 연구자들이 붙인 용어이다.

강화학파는 정제두의 후손 및 문인·손서(孫壻) 등으로 연결되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전주이씨 덕천군파, 평산신씨 신대우(申大羽) 가문 등의 소론(少論) 명문가가 당화(黨禍)를 입어 강화도에 정착함으로써 형성되었다. 이들은 노론성리학파의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개성과 사실성을 중시하는 학풍을 전개하여 나갔으며,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는 서구 또는 일본 추종적인 근대화 정책을 거부하며 자주적인 근대화의 추진을 모색하였다.

진천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 및 근대 개항기에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활동한 강화학파, 즉 정제두의 양명학풍을 계승한 관료 유학자 및 독립 운동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요 인물로는 문원(汶園) 홍승헌(洪承憲)·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학산(學山) 정인표(鄭寅杓)·연재(淵齋) 정은조(鄭誾朝)·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을 들 수 있다.

[변천]

홍승헌[1854~?]은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증손자로 그 조부가 되는 홍익주(洪翼周)가 순조 대에 진천현감을 지내면서 별업(別業)[곧 田莊]을 일으킴으로써 자손들이 진천에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형성하였다. 진천에 이거한 이후 아버지 홍유명(洪裕命)과 홍승헌 자신은 관직이 모두 참판에 이름으로써 지역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하곡 정제두의 6대손인 기당 정원하의 가문도 아버지 정기석(鄭箕錫)이 진천과 문의(文義)에 별업을 마련하는 한편 진천에 정착하였다. 이후 진천군은 강화학파가 강화학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데 유력한 거점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대우의 세 아들 중 하나였던 석천을 중심으로 광주(廣州) 사촌(社村)의 신씨 집안이 진천 초평리 소론 반향과 나란히 강화학의 유력한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들 가문은 정조의 아들 덕천군의 후손인 철종의 등극과 더불어 오랜 기간의 폐족(廢族)상태에서 벗어나 관로에 다시 등용되었으며 고관을 역임하는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친일 추종적인 개항 및 개화 정책에는 반대 입장을 취하여 국권 피탈 이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대부분 망명 지사로 활약하면서 국권 침탈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활동사항]

홍승헌의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문일(文一) 호는 문원(文源)으로 정조 때 이조판서 및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의 5대 종손이다. 그 고조인 홍낙원(洪樂源)과 증조인 홍경모(洪敬謨)도 모두 이조판서를 역임하여 3대에 걸친 이조판서 집안으로 이름이 났다. 조부인 홍익주가 진천현감을 지내면서 전장을 마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호계(虎溪)마을에 정착하였다. 부친은 홍유명으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홍승헌은 1875년(고종 12)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가주서를 시작으로 문한직을 두루 거쳤으며, 좌부승지·병조참지·이조참의 등을 거쳐 36세인 1890년(고종 27)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1893년(고종 30)에는 39세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세워 이른바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나가자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기당 정원하 등과 연명으로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일본 추종적인 개화 정책을 거부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양명학에 바탕 한 자주적 개화 정책을 모색하였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으며, 뒤이어 충청남도 관찰사로 충청남도 양전지계사업 감독을 겸임하였다.

1903년 49세로 다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국운이 점차 기울어져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진천의 호계로 낙향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자 인척이자 양명학을 함께 연마하였던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정원하 등과 함께 고국을 등지고 만주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에서 이른바 신한촌(新韓村)을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진척시켜 나가던 중인 1914년에 이국땅 만주의 안동현(安東顯)에서 61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원하[1855~1822]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성조(聖肇)하곡 정제두의 6대 종손이다. 아버지는 연안도호부사 정기석(鄭箕錫)이고, 어머니는 풍산홍씨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아가 홍문관수찬 등 문학직을 거친 뒤 1878년(고종 15) 서장관으로 동지사의 일원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0년(고종 17) 증광감시의 시관이 되었을 때 과장(科場)의 질서가 문란하여 파방됨으로써 고성현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서 1882년(고종 19)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후 우승지를 거쳐 1893년(고종 30) 39세로 대사헌에 올랐다.

대사헌에 다시 임명되었던 1894년(고종 31)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세워 이른바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나가자 영재 이건창·기당 정원하 등과 연명으로 토역소를 올려 일본 추종적인 개화 정책을 거부하고 강화도에 들어가 양명학에 바탕 한 자주적 개화 정책을 모색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자 인척이자 양명학을 함께 연마하였던 홍승헌·이건승 등과 함께 만주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에서 이른바 신한촌을 바탕으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을 진척시켜 나가던 중인 1925년 이국땅 만주에서 72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인표(鄭寅杓)[1855~1935]는 본관이 동래(東萊), 자는 형백(衡伯), 호는 학산(學山)으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용양위부사과 정욱조(鄭旭朝)로 진천에 거주하였다. 1892년(고종 2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등을 거쳐 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1894년(고종 31) 관제 개정 이후에는 남산의 노인정회담에 교정청(校正廳) 관원으로 참여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의 종사관을 지냈다. 1900년 통정대부로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올랐으며, 1904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국권이 상실된 이후에는 진천의 향리로 내려와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1911년 일제가 식민 지배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명망가들을 이용할 때 충청북도 진천군참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64세인 1919년 정인표 및 1901년 일가로 진천으로 이거해온 위당(爲堂) 정인보의 부친 정은조 등과 함께 『춘경대아집첩(春耕臺雅集帖)』을 발간하였다. 정인표는 홍승헌·정원하 등과 같이 망명하여 국권 회복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면서 후학을 육성하는 활동을 벌였다.

정은조[1856~1926]는 본관이 동래(東萊), 자는 노언(魯言), 호는 연재(淵齋)로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손자이다. 1880년(고종 17) 증광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아갔으며, 1882년(고종 19) 한림소시(翰林召試)에 합격하여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문한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87년(고종 24)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대사성·대사간·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비서승(秘書丞)으로 명성황후의 국장을 주관하였고, 1899년에는 성천군수를 지냈다. 이후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1906년에는 예식원(禮式院) 장례부경(掌禮副卿)에 올랐다.

한편 헤이그밀사 활동으로 잘 알려진 보재 이상설은 국권 피탈 및 망국(亡國)에 대응하여 일찍이 을사조약 때부터 국외 망명을 구상하면서 적극적인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 선각자의 한 사람이다. 즉, 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지만,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하여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그 추진 단체인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으나 12월 체직(遞職)되자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섰는데 국왕 고종에게 ‘순사지의(殉社之義)’로써 거부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그 자신도 민영환(閔泳煥)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 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국외로 망명하여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만국평화회의의 밀사로 활약하는 등 주로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14년에는 한일병합 이후 최초로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는 등 1917년 병사하기까지 러시아령 지역 광복 운동의 실질적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위당 정인보[1893~1950]는 강화학파의 미래 기대주로 선정되어 교육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홍승원과 정원하가 1910년 가산을 정리하여 국외로 망명하기로 하였을 때 본래는 정인보의 스승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도 동행하기로 하였으나, 양명학의 후계 양성을 위해 되돌아왔던 것이다.

정인보 또한 강화학파 스승들의 당부를 잊지 않고 진천·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면서 강화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였다. 또한 1912년에는 상해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교포의 정치· 문화적 계몽 활동을 주도하는 한편 국제 정세를 익혔다.

그리하여 주체적인 민족 진로의 방향을 양명학과 실학을 결합한 새로운 유교 혁신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고 파악하여 1930년대부터 이른바 ‘국학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일본 추종적인 개항에 반대하여 주체적인 근대화의 방략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강화학파의 의도가 정인보에 이르러 하나의 결실을 맺으면서 일제강점기에 비타협적 민족운동이라는 하나의 이론적·실천적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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