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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34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전호수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

[개설]

1413년(태종 13) 행정단위 및 명칭으로서 ‘진천현(鎭川縣)’이 제정되어 오늘날의 ‘진천(鎭川)’이라는 지칭의 기원을 이루었다. 행정직제상으로는 종6품관 수령인 현감이 설치되었으며, 진천현감은 청주진관 소속의 절제도위를 겸하였다. 지리적으로는 한양에서 경기도 죽산을 거쳐 충주와 청주를 잇는 교통로와 경기도 소사를 거쳐 청주로 이어지는 교통상의 요충지에 자리를 잡아 임진왜란·병자호란 및 1413년 이인좌(李麟佐)[ ?~1728]의 란(亂) 등 군사적으로도 많은 사건을 겪었다. 특히, 근대 철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경기도 남부 지역과 교류가 빈번하였으므로 양반사대부의 퇴거지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금강의 양대 지류의 하나인 미호천(美湖川)이 군의 북부로부터 중앙을 거쳐 서남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평야지대가 발달하였다. 그에 따라 일찍이 유력대성(有力大姓)의 재지기반이 발달했으며, 상대적으로 많은 조세액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진천 지역에 재지기반을 둔 유력성씨로는 이른바 ‘1놋점·2초평·3논실’로 평가된 문백면 놋점의 연일정씨(延日政氏), 초평면 용정리경주이씨(慶州李氏), 이원면 논실의 평산신씨(平山申氏)의 3대 문중을 들 수 있다. 이들 문중은 백원서원(百源書院) 및 만권루(萬卷樓) 등을 건립하여 진천 지역의 교육진흥 및 문화 창달에 기여하였다.

한편 진천 지역은 오늘날의 차령산맥에 해당하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과 금북정맥(錦北正脈)이 군의 동북부에서 서남부로 흘러 높은 산지가 발달하였던 관계로 불교 사찰의 발달과 더불어 조선 후기 내지 근대 이행기에는 반왕조(反王朝) 세력의 이동로 및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즉, 조선 말기에 천주교 확산의 실질적 공로자인 최양업(崔良業)[1821~1861] 신부가 활동한 배티성지라든가, 이 지역의 산줄기가 동학(東學) 북접(北接) 교단의 경기도·황해도 지역으로 확산되는 주요 통로 이용되었던 것이 그 예이다.

[명칭 및 연혁]

오늘날의 진천 지역 명칭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에 일어난 의미 있는 변화 중의 하나는 ‘진천’이라는 명칭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만, 그 명칭의 실질적인 기원은 이미 고려 초에 제정된 명호(名號)인 ‘진주(鎭州)’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오늘날의 명칭에 해당하는 ‘진천’이라는 명칭은 어쨌든 1413년(태종 13) 전국에 걸친 군현제의 정비 과정에서 발생한 것임도 특기해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명칭은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에 의한 근대적 행정개혁 조치에 따라 진천 지역이 현(縣)에서 군(郡)으로 개편될 때에도 명칭상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사용된 진천 지역을 가리켰던 또 다른 명칭으로 ‘상산(常山)’이라는 별호(別号)에도 유의할 필요성이 있다. ‘상산’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고려 초기 성종 대에 처음으로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그 밖의 군현에 대해서는 별호의 제정을 통해 의례적으로나마 중앙권력의 지배를 구현해보고자 한 의도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이 명칭이 공식적 명칭인 ‘진천’과 더불어 여러 면에서 진천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활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의 역할과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상산’이라는 명칭이 갖는 조선시대의 역할과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주목해 볼 수 있는 사항은 진천현 관아 건물의 중심에 위치했던 객사(客舍)의 명칭인 ‘상산관(常山館)’을 들 수 있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마다 설치된 국왕의 ‘생사당(生祠堂) ’ 기능을 수행한 준종교적 건물이라는 점에서 관청 건물을 대표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따라서 그 객사의 명칭은 공식적인 군현 명칭에 대응될 수 있는 별호를 선택하여 제정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사용된 명칭은 그 고을을 대표하는 제2의 지명으로서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널리 차용하여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조선시대 진천현을 진호(鎭護)하였던 주산(主山) 또는 진산(鎭山)의 명칭이 ‘상산’이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성씨의 관향과 관련해서도 이 명칭이 애용되었던 사례로 고려 중기 이래 진천 지방의 대표적인 토착 세력의 하나인 ‘상산임씨(常山林氏)’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조선시대 진천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이 ‘진천’이었다면, 별호로써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상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참고적으로 진천 지역을 지칭했던 역대의 명칭을 살펴보면, 삼한 또는 백제시기에 사용된 명칭으로는 ‘수지(首知)·신지(新知)’를 들 수 있으며, 삼국 및 통일신라기의 명칭으로는 금물노(今勿奴)·만노(萬弩)·흑양(黑壤)·황양(黃壤)이 있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부여된 명칭으로는 강주(降州)·진주(鎭州)·창의(彰義)·의령(義寧)이 있었다.

[행정편제 및 지역기반]

행정직제상으로는 1413년(태종 13) 팔도관찰사제에 입각한 군현제의 정비에 따라 종6품직 수령(守令)인 현감이 설치되었으며, 진천현감은 군사적 편제상으로는 청주진관 소속의 절제도위를 겸하였다. 그리하여 진천현감은 행정계통상으로는 청주목사(정3품)와 동일한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청주진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임하는 청주목사의 지휘를 받았다. 진천현감을 보좌하는 기구로는 자문적 자치 기관에 해당하는 유향소(留鄕所) 또는 향청(鄕廳)이 있었으며, 실무기능을 보좌하는 집행기구로는 ‘아전(衙前)’으로 불렸던 중앙 조정의 6조에 대응한 6방관속의 향리(鄕吏)들이 있었다.

일반 행정 이외의 특수 기능을 수행하는 소속기구로는 향교의 교육을 담당하는 훈도(訓導)가 1명 설치되었고, 비상시의 통신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봉수가 소이산(所伊山) 1곳에 설치되어 청주의 것대산 신호를 받아 음성의 망이산 봉수에 전달하도록 되어 있었다. 교통 및 공무여행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역원 조직으로는 장양역(長陽驛)태랑역(台郞驛)의 2개 역이 설치되었다. 일반 백성 및 상인(商人)들이 주로 이용한 숙박시설인 원으로는 시태원(時泰院)·영제원(永濟院)·태랑원(台郞院)·광혜원(廣惠院)·협탄원(脇呑院)의 5개 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 광혜원은 경기도 죽산에서 충주 또는 공주 감영으로 향하는 충청도의 초입에 설치된 원으로 신구(新舊) 관찰사가 인신을 교환하는 장소였다.

진천현의 행정구역은 조선 초기부터 면리제(面里制)로 개편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발달상은 조선 후기 영조(英祖) 대에 간행된 지리지인 『여지도서(與地圖書)』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면(面)은 고려시대의 촌(村)을 개편한 행정조직으로 진천현 관하에는 오늘날의 7개면보다 2배가 많은 15개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진천읍(鎭川邑)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남변면(南邊面)·북변면(北邊面)·행정면(杏井面)·성암면(聖巖面)의 4개면이 있었으며, 이월면(梨月面)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이곡면(梨谷面)과 월촌면(月村面)이 있었다. 오늘날의 덕산면(德山面)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덕문면(德文面)·산정면(山井面)·방동면(方洞面)·소답면(所沓面)의 4개면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문백면(文百面) 지역에는 문방면(文方面)과 백락면(白洛面)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 광혜원면 지역은 본래는 만승면(萬升面)에 해당하였고, 초평면(草坪面)백곡면(栢谷面)도 조선시대의 명칭과 구역이 그대로 계승된 경우에 해당된다. 대체로 2~4개면이 합병되어 오늘날의 읍·면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으며, 만승면·초평면·백곡면의 3개 지역은 본래 권역이 넓어 후대에도 그대로 조선시대의 구역과 명칭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각 면별 동리(洞里)구성을 살펴보면 남변면에는 관문리(官門里)·벽오리(碧梧里)·향교리(鄕校里)·적현리(笛峴里)·옹정리(瓮井里)·신대리(新垈里)의 6개리가 있었으며, 북변면은 상리(上里)·하리(下里)·사랑리(仕郞里)·옹암리(瓮巖里)·지습리(支濕里)의 5개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행정면에는 장관리(長管里)·하식리(下息里)·명신리(明信里)·사정리(沙亭里)·두건리(斗巾里)·행정리(杏井里)의 6개리가 분포하고 있었으며, 성암면에는 유점리(鍮店里)·여사리(如士里)·산기리(山岐里)·태산리(台山里)·태랑리(台郞里)·홍암리(紅巖里) 등 6개리가 있었다.

이곡면에는 상산리(常山里)·이곡리(梨谷里)·서원리(書院里)·답곡리(沓谷里)·독좌리(獨坐里)·역리(驛里)·구노리(九老里)의 7개 동리가 있었으며, 월촌면에는 장결리(長結里)·용전리(龍田里)·마흘리(馬屹里)·신평리(新坪里)·자래리(自來里)·주구리(周九里)·두곡리(杜谷里)·호암리(虎巖里)의 8개 동리가 분포하고 있었다. 덕문면 지역에는 상리·하리·석탄리(石灘里)·장척리(長尺里)·가리(加里) 등 5개리가 분포하였으며, 산정면에는 영주원리(永周院里)·용지리(龍池里)·기지리(機池里)·두촌리(斗村里)·옥동리(玉洞里)의 5개 마을이 있었다. 방동면에는 습지리(濕池里)·고척리(高尺里)·상방리(上方里)·하방리(下方里)의 4개리가 있었으며, 소답면에는 가척리(加尺里)·농소리(農所里)·몽촌리(夢村里)·목동리(木洞里)의 4개리가 있었다.

문방면에는 오경리(五更里)·성주리(城周里)·내굴리(內屈里)·외굴리(外屈里)·소가리(所加里)·어룡리(魚龍里)·문상리(文上里)·미래리(美來里)의 8개리가 있었으며, 백락면에는 반탄리(泮灘里)·은성리(銀城里)·대음리(大陰里)·석보리(石洑里)·분토리(分土里) 등 5개리가 분포되어 있었다. 만승면에는 신동리(新洞里)·만승리(萬升里)·회안리(會安里)·무수리(無愁里)·실안리(實安里)·장산리(長山里)·당동리(唐洞里)·죽동리(竹洞里)의 8개리가 있었으며, 초평면에는 통동리(通洞里)·영곡리(永谷里)·금한리(金汗里)·수문리(水門里)·생곡리(生谷里)·양촌리(陽村里)·지전리(芝田里)·선암리(仙巖里) 등 8개리가 분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백곡면은 두주리(斗周里)·유곡리(楡谷里)·모리(毛里)·노동리(蘆洞里)·수문리(水門里)·개죽리(介竹里) 등 6개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역사와 관련인물]

조선시대 진천현은 수도인 한양에서 3남 지방, 특히 충청좌도와 경상도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였으며, 아울러 금강의 2대 수원(水源)인 미호천과 그 지류들을 끼고 평야지대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유력대성들이 자리 잡고 활동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진천 지역의 유력성씨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통해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는데 한(韓)·임(林)·송(宋)·심(沈)·유(庾)·미(彌)·고(高)·양(梁)·하(河)·장(張) 등 10개 성씨가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력가문들도 조선왕조를 거치는 동안 부침(浮沈)과 성쇠(盛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그 대표적 가문은 앞서 언급한 3대 문중이었다. 이밖에도 진천 지역의 유력대성으로는 덕산면의 기계유씨(杞溪兪氏)와 평강채씨(平康蔡氏), 문백면청주이씨(淸州李氏)상산임씨(常山林氏), 백곡면전주이씨(全州李氏), 만승면의 해주오씨(海州吳氏), 이월면양성이씨(陽城李氏)강릉김씨(江陵金氏), 초평면완산이씨(完山李氏)광산김씨(光山金氏) 등이 동족마을을 이루면서 번성하였다.

이러한 유력가문과 연관하여 조선시대 진천 지역의 역사를 보면 우선 태조~태종 연간의 사실과 관련해 문백면청주이씨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중심인물은 태조태종의 2대에 걸쳐 부마(駙馬)를 배출하였으며, 그 자신도 정사공신(定社功臣) 및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고 영의정에 오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이거이(李居易)[1348~1412]이다. 이거이의 두 아들, 즉 장자인 이애(李薆)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올랐으며, 넷째 아들 이백강(李伯剛)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결혼하여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이 되었다.

이렇듯 태조태종의 2대에 걸쳐 부마를 배출한 집안이었던 만큼 이 가문은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 건국기의 체제 정비 작업에 참여하여 많은 공훈을 세우게 되고, 두 차례에 걸쳐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문하좌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태종의 야심찬 군제 개혁이었던 사병혁파(私兵革罷) 조치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아 향리로 방축되고, 그 아들 이애와 더불어 진천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이자 공신의 집안이었던 만큼 향리에서의 위세는 대단하였던 듯하다.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 있으니, 다름 아니라 진천읍 상계리 멱수마을 입구에 있는 ‘청주이씨사패비(淸州李氏賜牌碑)’라 하겠다. 이 비는 이거이의 집안이 국가로부터 받은 전장(田莊)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징표로 세운 기념물이자 증빙문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권역이 인근의 산천을 경계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문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세종~세조 연간 진천 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문중으로는 이월면 사곡리강릉김씨덕산면 두촌리(斗村里)진천송씨(鎭川宋氏) 가문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사곡리강릉김씨와 관련된 인물은 그 효행 사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린 모암(慕庵) 김덕숭(金德崇)[ ?~1448]이며, 두촌리진천송씨와 관련된 사적은 세조 대의 사육신(死六臣) 사건이다.

김덕숭목은(牧隱) 이색(李穡)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남달리 효행이 뛰어나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지내다가 그만두고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스스로 꿩고기와 잉어를 잡았으며, 명절이나 생일에는 반드시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어 부모를 기쁘게 하였다. 62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렀으며, 70이 넘도록 95세의 부친을 봉양하다가 돌아가시자 마찬가지로 3년간 시묘살이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였다. 또한 92세의 장모를 모셔다가 정성을 다해 모셨으며, 76세를 일기로 부친의 상중에 운명하였다. 김덕숭의 지극한 효성은 이미 생전에 국왕 세종에게도 알려져 1444년(세종 26) 청주의 초정리로 요양을 위해 행차하였던 세종께서 직접 술 20병, 마른 청어 50묶음, 마른 돼지고기와 노루고기 4마리, 꿩고기 40마리, 미곡 10여석을 하사하였으며, 그 사적을 『삼강행실도』에 싣도록 하였다. 이후 선조 대에는 진천 지역의 효행 인물을 기린 백원서원에 제향되었다.

한편 세조 대의 사육신 사건과 관련된 진천송씨의 인물은 송석동(宋石同) 3대(代)이다. 송석동진천송씨의 시조인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9대손인데 1455년(단종 3)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이른바 사육신 사건에 연류되어 그 부친 송저(宋儲)와 아들 송일창(宋日昌)·송일녕(宋日寧)·송일안(宋日安)의 3형제, 즉 3대가 모두 참살 당하였다. 또한 그 친족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송반(宋盤)은 관직을 삭탈 당했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병화(兵禍)에 맞서 진천 지역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김효건(金孝騫)[1584~1666]·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1569~1626]·임수전(林秀筌) 등이 있으며, 진천 출신의 인물로는 이정영(李廷英)이영남(李英男)이 있다. 병자호란 시기에는 유창국(柳昌國)조감(趙瑊)이 진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진천 출신의 인물로는 이경선(李慶善)·김경세(金景世)·김익견(金益堅) 등이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진천 지역의 임진왜란 초반 대응양상은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천 지역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일본군 제3번대의 진격로에 위치하여 왜군이 추풍령을 넘어 영동~청주를 거쳐 쳐들어왔다. 그러나 당시 방어책임자였던 진천현감 홍지(洪趾)는 충청남도 내포(內浦) 지역으로 도망가 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인물은 진천현감 휘하의 집강(執綱)[향약소 또는 향청의 책임자]이었던 김효건이었다. 김효건은 관군을 지휘할 주장(主將)이 달아나 버린 상황에서 관민(官民)을 수습하여 지금의 문백면 태락리에서 진천읍 원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왜적을 급습하여 타격을 주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주요 동력의 하나는 각 지역 의병의 활약이었다. 의병군은 비록 규모나 무기 면에서는 열악했지만 지역의 사정이나 지리에 익숙했던 만큼 유격전 방식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활약을 통해 승리를 견인하였다. 진천 지역에서도 1592년 8월 평양 전투를 전후하여 의병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이시발임수전 등이 활약하였다. 이시발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청주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와 더불어 1592년 8월 1일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한 뒤 진천 지역을 거쳐 수원 지역으로 북상하여 활동하였다. 임수전은 그 동생 임수명(林秀蓂)과 함께 이시발이 진천에서 왜병을 격퇴하고 북상한 이후에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경기도 죽산 봉성(鳳城)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진천 출신의 관장(官長)으로 전공을 세우거나 전몰한 인물로는 이정영이영남이 있다. 이정영은 진천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음죽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조정의 명령에 따라 관내 군사를 징발하여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충주 탄금대(彈琴臺)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이영남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경상우수영 휘하 율포권관(栗浦權管)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군에 연합 지원함대의 구성을 요청하는 청병사절(請兵使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있던 1598년(선조 31) 11월 18일 일본군과의 최후의 해전이었던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좌하여 교전하다가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유창국조감은 병자호란을 맞아 인근의 보장처인 만노산(萬弩山)[또는 만뢰산]으로 피난하였다가 피난민을 수습하여 성을 쌓고 호군(胡軍, 淸軍)의 공격을 물리쳐 지역민을 안정시켰다. 즉, 유창국조감은 병자호란을 맞아 만노산성(萬弩山城)으로 피신한 인근 7읍 수천 명의 피난민이 통솔자가 없는 무질서 상태를 보이자 대오를 정비한 다음 성책을 꾸미고 전비를 갖추게 하여 청병(淸兵)의 이틀에 걸친 공격을 막아내어 지역민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한편 병자호란 당시 진천 출신으로 관장 또는 관직에 있으면서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한 인물로는 이경선·김경세김익견 등이 있다. 이경선은 남포(藍浦)현감으로 있으면서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광주(廣州) 검천(檢川)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김경세김익견은 모두 무과 출신으로 각각 주부(主簿) 및 무관직에 있으면서 남한산성 방어군에 참여하였다가 전몰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 진천 지역의 역사상과 관련된 사항으로는 사림(士林)의 지역 활동을 보여주는 서원건립과 향촌 활동 및 대립, 특히 초평이씨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만권루(萬卷樓) 건립과 소론(少論) 세력과 연관된 이인좌의 난을 주목해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가 쇠퇴해 가는 역사적 현상으로는 진천농민항쟁과 천주교의 확산 및 동학 세력의 활동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진천 지역의 향촌 세력 및 사회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먼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평산신씨(平山申氏) 문중의 신잡(申磼)[1541~1609]에 의한 백원서원의 건립이다. 신잡은 1584년(선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병조판서에 이른 인물로 1567년(선조 1) 진천군 이월면 내촌리(內村里) 당골에 처조부(妻祖父)의 호상(護喪)을 위해 들렀다가 진천 지방의 향학(鄕學)이 부진함을 인식하였다. 이에 1608년(선조 42) 관직을 마치고 낙향하여 이월면 노은리(老隱里)에 서원을 세우고 지방 인재를 육성하였다. 서원의 명칭인 ‘백원(百源)’은 효(孝)는 ‘백행지원(百行之源)’, 즉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1669년(현종 10) 사액을 받을 때 붙인 것이다. 제향된 인물 가운데 인재(麟齋) 이종학(李種學)·모암 김덕숭·행원(杏園) 이부(李阜)·송애(松崖) 이여(李畬)는 각각 절의·효행·경술(經術)로 이름을 얻었지만, 공통적으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편 신잡은 후손들에 의해 1774년(영조 50) 노은영당(老隱影堂)이 건립되어 제향되었다.

진천 지역에 세워진 또 다른 서원으로는 숙종 대에 8차례나 영의정을 지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1646~1715]을 제향하였던 지산서원(芝山書院)이 있다. 최석정은 1711년(숙종 37)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낙향하여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지산서원은 그의 사후 7년 뒤인 1722년(경종 2) 제자인 이시진(李時振) 등의 발의로 사액서원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경종 대에 진천 지역의 사림문화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경주이씨 가문의 이하곤에 의해 경영된 장서각(藏書閣)인 만권루, 즉 완위각(宛委閣)을 들 수 있다. 이하곤이시발의 후예로 그 조부인 이경억(李慶億)[1620~1673]은 좌의정, 아버지인 이인엽(李寅燁)[1656~1710]은 대제학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었으나 대과에 합격하지 못하자 1722년 고향인 초평면 양촌(陽村)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서화에 힘썼다. 특히 그는 장서에 뜻을 두어 옷을 벗어 주고라도 책을 사 모아 장서가 1만권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 서재를 ‘완위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김창흡(金昌翕)·조귀명(趙龜命)·이병연(李秉淵)·윤순(尹淳)·정선(鄭敾)·윤두서(尹斗緖)·이광사(李匡師) 등의 문장가 및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 개성과 사실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문풍(文風)을 진작하였다.

영조 대 이후 진천 지역의 사림문화와 관련해서는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1683~1741]의 활동을 주목할 수 있다. 채지홍은 16세 때부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 8대 제자인 ‘강문8학사(江門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얻은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그는 벼슬에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두어 향리인 진천군 문백면 봉암리(鳳巖里)에서 학문 및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741년(영조 17)에 운명하였다. 그의 사후 후학 및 제자들이 1825년(순조 25) 사우를 건립하여 ‘봉암향현사(鳳巖鄕賢祠)’라고 이름을 짓고 제향하였다.

한편 영조·정조 대를 거치면서 성리학 및 예학(禮學)·도학(道學)은 일층 논리적 기반을 정비하고 현실 정치를 장악해감에 따라 순조 대에 들어서는 이론(異論)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소중화적 정통론을 강화해 갔다. 아울러 권력이 안동김씨·풍양조씨·여흥민씨 등의 일부 가문에 의해 장악되는 세도정권(勢道政權)이 성립됨에 따라 실용적 경세가 및 실학자들에 의해 제안된 여러 방식의 개혁안도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점차 현실을 외면하고 종교 신앙에 의지하거나 『정감록(鄭鑑錄)』 등의 반왕조적(反王朝的) 사상에 기대고자 하였다. 정조 대 이후 외래 종교인 서학(西學), 즉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고, 몰락양반 출신의 최제우(崔濟愚)가 세운 동학(東學)이 일세를 풍미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더 이상의 봉건적 수탈과 억압을 감내할 수 없게 되자 1862년(철종 13) 일제히 항거하여 일어났다. 이러한 18세기 후반 이후의 역사적 과정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진천 지역에서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으며, 때로는 중심지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먼저 천주교의 수용에 있어서 진천 지역은 하나의 중심지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름 아니라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사제로 서품되어 천주교 확산의 실질적 기반을 닦았던 최양업 신부가 백곡면진천 배티 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최양업의 본관은 경주이나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출생하였다. 1836년(헌종 2)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42년(헌종 8)까지 사제수업을 받았으며, 1849년(헌종 15)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어 1849년 말 귀국에 성공하여 1861년 과로와 식중독으로 운명하기까지 12년 동안 첫 본당으로 부임한 진천 배티의 신앙촌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벌였다. 당시 그는 수개월 정도만을 배티 신앙촌에 머무르고 나머지 기간에는 사제의 친견을 소망하는 신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당시 일반 백성들이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1862년(철종 13)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3남 지방을 휩쓴 농민 봉기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862년(철종 13) 5월 중순 진천 지역의 민중들은 전임 현감 이호신(李鎬臣)에 의해 부당하게 가중 책정된 결가(結價)를 축소해 줄 것을 호소하는 자신들의 요구가 신임 현감 김병유(金秉儒)에 의해서도 거부되자 항쟁하였다. 1861년(철종 12) 7월 도임한 전임 현감 이호신은 탐학(貪虐)한 인물로 부임 이후 서리의 가하전(加下錢) 1700냥을 착복하는 등 각종 공전(公錢)을 빼돌렸다. 이에 각 면의 조세수취를 담당한 서원(書員)들이 1861년 재해로 감면된 세액 515냥을 착복한 것을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군민들에게 20냥의 과도한 비용을 책정하였다.

이에 군민들은 결전의 액수를 낮추어 줄 것을 여러 차례 청원하였다. 그러나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62년 1월 이호신은 남평현감으로 옮겨가고 남평현감이었던 김병유가 부임하게되자 군민들은 다시 김병유에게 결가의 재조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신임 현감 김병유는 군민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전임 현감이 책정한 결가의 수취를 단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뿐이었다. 이에 군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부당한 조치를 시정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들고 일어났다. 그 결과 전임 현감 이호신은 착복죄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신임 현감 김병유는 즉각 파직되었다. 그러나 농민항쟁을 주도한 인물 또한 체포되어 일정한 처벌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천농민항쟁은 1962년 당시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과 연계되지 못했으며 문제를 진천 내 탐관오리나 조세수취 문제로만 인식했다. 이런 면에서 이는 여전히 중세 군현제의 틀 내에서 전개되는 미래적 전망이 결여된 항쟁이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진천 지역의 사회 문화상과 연관하여 마지막으로 주목해 볼 수 있는 사항으로는 강화학파(江華學派)라고 부를 수 있는 일련의 관료 유학자 및 민족지사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중심인물은 고종 대에 활동한 문원(汶園) 홍승헌(洪承憲)·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학산(學山) 정인표(鄭寅杓)·연재(淵齋) 정은조(鄭誾朝)·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이다. 이들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경기도 강화에 은거하여 정립한 양명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개항 이후 일본 추종적인 개화정책에 반대하면서 주체적인 근대화의 방법을 모색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명문가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거나 자결하여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으며, 국외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정인보에 이르러서는 양명학과 실학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국학(國學)’의 창출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 새로운 근대체제를 창출하는 이론적 바탕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즉, 일제에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주적인 근대화의 추진을 모색하는 민족운동 중의 한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김효건(金孝騫)[1584~1666]· 을
김효건(金孝騫)[1537~1613]· 으로 수정 바랍니다.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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