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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30
한자 淸州牧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낙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983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983년

[정의]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이 속해 있던 행정 구역.

[개설]

청주(淸州)는 919년(태조 2)에 청주로 이름 붙여졌고 983년(성종 2)에 처음으로 12목을 설치했을 때 청주가 그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 후 1018년(현종 9) 8목으로 정리되었을 때도 청주목(淸州牧)은 충청권역의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정경위 및 목적]

신라 말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 호족이라 불리는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삼국시대 왕들도 지방 세력들을 억압·회유하여 지배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으며, 고려 태조도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이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새롭게 확보된 지역에 대하여는 주(州)를 설치하거나 부(府)를 설치하여 정치적·군사적 지배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은 그동안 해체되었던 군현제 질서를 재편하는 일환이기도 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940년(태조 23) 3월에 여러 주·부·군·현의 칭호를 고쳐 지방제도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경종 때까지는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지 못하였고 재지관반(在地官班)을 통해 운영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금유(今有)와 조장(租藏), 전운사(轉運使)라는 조부의 징수와 보관을 담당하는 관원을 직접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상주하는 외관이 아니라 특수한 임무를 띠고 일시적으로 파견된 것이다.

광종 때 중앙에서 왕권의 안정이 이루어지자 성종 때는 지방에 대한 통제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지배력을 행사해 오고 있어 중앙 행정력의 한계가 여전하였다. 983년에는 12주에 주목을 두면서부터 상주하는 외관[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청주목이 설치되었다.

[변천]

청주목은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党縣)으로, 신라 때인 685년(신문왕 5)에 처음으로 서원소경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다. 940년에 청주로 고쳤고 983년에 처음으로 전국에 12개 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청주는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995년(성종 14)에 전국의 12개 주에 절도사를 두면서 전절군(全節軍)이라고 불러 중원도(中原道)에 소속시켰다.

1012년(현종 3)에 이를 폐지하여 안무사로 하였으며, 1018년에 목으로 정하여 8개 목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청주에 소속된 군(郡)이 2개[연산·목주], 현(縣)이 7개[진주·전의·청천·도안·청당·연기·회인]가 있었으며, 지부사(知府事)가 1개[공주], 지사군(知事郡)이 2개[홍주·천안]가 있었다. 진천은 이때 청주목 소속의 7개 현 가운데 하나였다.

[의의와 평가]

청주는 신라 때 서원경으로 승격된 이래 중부 지방의 행정·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위상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고려에 들어서도 청주는 충청도 지역에 중앙의 행정력이 침투해 들어가는 거점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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