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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20
한자 今勿奴郡
이칭/별칭 흑양군,황양군,만노군,수지,신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집필자 김영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고구려시대
시행연도/일시 고구려시대
폐지연도/일시 6세기 중엽

[정의]

고구려 때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관련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을 황양군(黃壤郡)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여지도서(輿地圖書)』「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조에는 금물노군은 고구려 지명으로 만노군(萬弩郡), 수지(首知), 신지(新知)라고도 하며, 경덕왕 때에 흑양군(黑壤郡)으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진평왕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인 김서현(金舒玄)만노군 태수로 삼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내용]

금물노군이라는 명칭은 검다는 뜻의 ‘금물’과 땅이라는 뜻의 ‘노’가 합쳐진 순 우리말이다. 고구려의 지명이라는 기록이 우세하나 신라의 지명이라는 설도 있는 것은 금물노라는 지명이 삼국시대에 한자로 표기되기 이전의 지명이었기 때문에 생긴 혼선이다.

금물노’의 다른 이름을 ‘금물내’라고도 한 것은 한자로 소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비슷한 발음의 글자를 선택한 결과로 동일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만노군이라고 불렸던 것은 신라 진평왕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고구려와의 접경 지역인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고구려의 금물노군을 차지한 뒤에 만노군으로 지명을 고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노군이라는 지명은 6세기 중엽 신라가 진천 지역의 고구려 금물노군을 차지한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흑양군이라는 지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인 757년(경덕왕 16)에 순 우리말 지명인 금물노군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변천]

금물노군이 위치한 충청북도 진천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에 고구려의 영유가 되었다. 백제 때 지명은 알려진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고구려가 영유하던 시기의 지명은 금물노군이었다. 6세기 중엽 신라의 영역이 된 이후에는 만노군이라고 불리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다시 흑양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고려 초기에는 강주(絳州)로 개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물노군이라는 지명은 고구려의 토착적인 지명으로 고구려 말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금물노군 지역을 영유하면서 만노군이라고 지명을 바꿨다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경덕왕 때 다시 한자식 표현인 흑양군으로 이름을 바꿨다. 삼국시대부터 영유권의 변천에 따라 지명이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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