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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006
한자 世居姓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집필자 강민식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세거해 온 유력 성씨.

[개설]

진천군의 성씨 내력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다. 진천현의 토성(土姓)으로 한(韓)·임(林)·송(宋)·심(沈)·유(庾)·미(彌)·고(高)·양(梁)·하(河)·장(張) 등 10개 성씨가 있다. 진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성씨조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10개의 성씨 중 임씨와 송씨 만이 진천을 본관으로 하여 지금까지도 세거 성씨로 자리하고 있으며, 나머지 성씨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진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1. 임씨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 중 고려 때의 임희(林曦)흥화군(興化君)에 봉해지고 혜종(惠宗)의 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임씨는 진천의 별칭인 ‘상산(常山)’을 본관으로 하여 상산임씨라 불리며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龜山洞)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이밖에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임연(林衍)이 보인다. 여러 지리지의 인물조에는 시조 임희, 충신조에는 임수전(林秀筌)임현(林賢), 효자 임유원(林有元)·임을엽(林乙葉)·임경석(林慶錫)이 보인다.

2. 송씨

송씨는 고려 인종 때의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을 시조로 한다. 후손들이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진천 송인 묘소를 중심으로 800년 가까이 세거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송언기(宋彦琦)송국첨(宋國瞻) 등 고려 때 활동했던 진천 출신 인물이 보인다. 송언기는 어려서부터 글을 읽었고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에 이르렀다. 일찍이 몽고와 강화 사신으로 네 번이나 다녀와 변방이 안정되었다. 임금이 다시 그를 몽고 사신으로 보내려 했는데 송언기가 병들어 재상이 말하기를, 송언기가 난 것은 국가의 복이요, 죽는 것은 국가의 걱정이라고 할 정도였다.

송국첨은 성품이 강직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여 원수같이 대했다. 문장을 잘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史館)에 들어갔다. 고종 때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제수되었고, 형부상서(刑部尙書)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역임하였다. 이 밖에 충신으로 송저(宋儲), 효자로 송광도(宋匡度)가 이름을 떨쳤다.

[대표적인 세거 성씨]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무신란(戊申亂)을 겪으면서 진천군의 성씨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천[상산]을 본관으로 하는 임씨와 송씨를 제외한 진천군의 대표적인 세거 성씨는 아래와 같다.

1. 김해김씨

김해김씨김유신의 부친 김서현(金舒鉉)이 진천의 옛 이름인 만로군 태수로 부임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리지 등에 보이지 않다가 조선 영조 때 김우혁(金宇赫)·김우광(金宇桄) 형제가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진천읍 송두리로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2. 강릉김씨

강릉김씨는 고려 말 조선 초에 김사혁(金斯革)이 아들 김천익(金天益)과 함께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로 옮겨오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주한 지 600년에 백곡면 석현리를 비롯,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김천익의 아들 김덕숭(金德崇)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있다.

3. 전주최씨

전주최씨는 조선 개국공신 최유경(崔有慶)이 만년에 진천군 초평면으로 이주한 이래 그 후손들이 500여 년 동안 세거하고 있다. 특히 많은 효자를 배출한 성씨로 이름났는데, 최유경·최사흥(崔士興)·최기(崔基)·최주민(崔柱旻)·최극성(崔克誠)·최종운(崔宗運)·최제두(崔齊斗) 등 많은 효자를 배출하였다. 또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한 최석정(崔錫鼎)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 은거하면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는데 그곳에는 지산서원(芝山書院)이 건립되었다.

4. 전주이씨

전주이씨정종세종 왕자의 후손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수의마을에는 금성대군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금성대군의 부부인 전주최씨가 피화 후 고향으로 낙향하고 증손 덕천군 이인(李仁)이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후손들은 숙종진천 금성대군 사당을 건립하였다.

5. 청주한씨

청주한씨한확(韓確)의 5대손 한광윤(韓光胤)이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석화동으로 이주한 이래 400여 년 동안 세거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토성에 한씨가 보여 조선 초기부터 진천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씨는 청주를 단일본으로 하여 진천한씨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6. 청주이씨

청주이씨는 고려 말 문간공(文簡公) 이정(李挺)이 이주한 이래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문백면 사양리를 중심으로 널리 세거하고 있다. 이정의 아들 이거이(李居易)가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면서 크게 두드러졌다. 상계리 멱수마을에 세워진 사패비는 이 지역 일대를 국가로부터 받은 영지로, 당시 청주이씨의 위상을 보여준다.

7. 영일정씨

영일정씨는 1665년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묘소가 경기 고양으로부터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로 이장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鄭瀁)은 1658~1659년 진천현감을 역임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부의 묘소를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묘소 이장과 함께 사당과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8. 경주이씨

경주이씨명종이대건(李大建)·이시발(李時發)·이시득(李時得) 부자가 제천으로부터 청주 오근장을 거쳐 입향한 이래 진천군의 세거성씨로 자리하였다.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일대에 크게 세거하며 입향조 부자의 신도비 및 묘소, 완위각 터 등 관련 유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이하곤과 독립운동가 이상설을 배출하였다.

9. 안동김씨

진천군에 세거하는 안동김씨는 구안동 계열이다.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의 후손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고려 말 충신 김사렴(金士廉)의 6대손 김인(金隣)이 이주한 이래 400여 년 세거하고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효건(金孝騫)과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천주·김천장·김성옥·김성추 등이 유명하다. 진천읍 사석리에는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천주 등의 4충신문이 있다.

10. 평산신씨

평산신씨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한다. 조선 초 좌의정을 역임한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의 5대손 신잡(申磼)이 낙향하여 백원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신립(申砬)신잡의 동생으로 많은 문무 관료를 배출하였다. 이월면 노원리를 중심으로 관련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11. 양성이씨

양성이씨는 고려 때 귀화한 이수광(李秀匡)을 시조로 한다. 조선 연산군 때 이수보(李秀寶)가 이주한 이래 400여 년 이상 세거하고 있다.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영남(李英男) 장군의 묘소가 위치한다.

12. 문화유씨

문화유씨는 고려 유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한다. 임진왜란 때 유헌민(柳獻民)이 아버지 유종수(柳宗壽)를 모시고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로 피난 온 이래 정착하여 세거성씨를 이루었다. 많은 관료와 충신, 효자를 배출하였다.

13. 평양조씨

평양조씨는 조춘(趙春)을 시조로 하고 성종 때 청산군수를 역임한 조맹손(趙孟孫)이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로 이주하였고, 또 고려에 절의를 지킨 조손(趙損)이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로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14. 여흥민씨

여흥민씨는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하고 고려 때의 인물인 문순공(文順公) 민적(閔頔)의 후손들이 주로 이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15. 경주정씨

경주정씨는 정진후(鄭珍厚)를 중시조로 하고, 조선 중종 때 정방광(鄭邦絖)이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로 이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정봉남(鄭鳳男)은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났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3.22 인명 오자 수정 정나통(鄭那統) -> 정방광(鄭邦絖)
이용자 의견
김** 김사렴(金士廉)의 6대손 김인(金隣)이 를
김사렴(金士廉)의 증손자 김인(金隣)이 로 수정 바랍니다.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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